[리뷰] 연극 ‘13월의 길목’에서 상처받은 ‘나’를 만나다

최종수정2018.09.30 14:01 기사입력2013.04.30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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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드라마로 ‘힐링’하는 비결? 울기보다는 손뼉 치기

 
▲ 연극 [13월의 길목](연출 구태환)의 공연장면 중 주인공들이 첫눈이 내리는 창밖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극단 수

▲ 연극 [13월의 길목](연출 구태환)의 공연장면 중 주인공들이 첫눈이 내리는 창밖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극단 수


    
(뉴스컬처=김현진 기자)
공연 시작 10분 전. 여유 있게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시계를, 다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배우들은 관객의 입퇴장과는 상관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연기가 한창이었다. 게다가 무대에는 봄기운이 완연한 실제 날씨와는 달리 연말 분위기가 녹아있었다. 트리가 전면에 배치됐고, 메리크리스마스 문구가 벽을 채웠다. 무대 위 세 여인은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미동도 없이 창을 응시하거나, 무대를 치우거나, 커피를 음미 중이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특별한 세계’, ‘봄에 만난 크리스마스.’ 시작점을 알 수 없는 연극 [13월의 길목](연출 구태환)의 첫 인상이었다.
 
# '13월의 길목'에 들어서다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은 한 해가 저물어가는 어느 날 저녁, 도시 변두리의 소극장 겸용 카페 '13월의 길목'이다. 연기가 한창이던 세 여인의 정체는 막이 오름과 동시에 베일을 벗는다. 무대 이곳저곳을 청소하던 사람은 카페 주인이자 연극배우인 선재(김정은 분)였고,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여인은 선재의 단짝 친구인 난주(이서림 분)였다. 커피를 음미하던 이는 카페의 단골손님인 가실(조하영 분)이었다.
 
세 여인의 일상적인 대화를 함께하던 것도 잠시. 카페에는 하나 둘 사람이 모여든다. 직업은 물론 취향도 제각각이다. 선재와 오랜 친구사이인 이도 있고, 카페가 첫 방문인 사람도 있다.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13월의 길목'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 제자의 손에 이끌려 카페를 찾은 인화는 이렇게 말한다. “여긴 참 이상해,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따뜻한 느낌이 드네...”
 
사람들은 첫 만남의 어색함을 풀고, 함께 모인 것을 기념하며 축배를 든다. 이들은 저마다의 장기로 분위기를 돋운다. 카페에 자주 들르는 사진작가 영수(김승철 분)는 그와 동거 중인 정희(황세원 분)와 함께 한바탕 탱고 춤을 추고, 대학교수이자 번역가인 인화(박현미 분)는 자신이 지은 시를 읊고, 인화의 제자이자 가실의 친구인 수현(박정길 분)은 인화의 시에 기타 반주를 입힌다.
 
# 사연 많은 13월
 
그러나 화기애애한 상황은 종종 반전된다. 너나 할 것 없이 털어놓는 서늘한 대사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밝은 표정 뒤에는 삶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이유는 하나. 이들의 삶은 자신이 그렸던 길이 아니다.
 
사진작가 영수는 폐허로 변해버린 분쟁지역을 찾아 기록을 남기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 안의 공허함을 발견한다. 선재와 난주의 동창이자 지방방송국 기자인 동호(이요성 분)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만만하게 굴지만, 속으로는 제 일에 회의감을 느낀 지 오래다. 동사무소 직원이자 작가 지망생인 가실(조하영 분)은 어릴 적 친구에게 저지른 잘못을 회상하며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리고, 교수인 인화는 스스로 정체돼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며, 그의 제자 수현은 전공인 천문학과는 상관없이 스페인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또한 카페의 운영자로 누구보다 여유로워 보였던 선재는 연극 무대에 미련이 있고, 그의 친구 난주는 답답한 현실로부터 일탈을 꿈꾸는 몽상가다.
 
각양각색의 사연 못지않게 관계도도 복잡하다. 이 작품을 100%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물의 대사나 행동은 물론 미묘한 눈빛 교환도 두루 확인해야 한다. 부부 사이나 마찬가지인 영수와 정희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동거 중이다.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그 완성을 꿈꾸지는 않는다. 각자의 인생이 불안한 탓이다. “이 사람을 만난 게 행복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는 정희의 의미심장한 대사, 정희를 향한 영수의 흔들리는 눈빛 등이 위태로운 관계를 증명한다.
 
대학방송국 선후배 사이인 선재, 난주, 동호도 마찬가지다. 셋의 분위기는 어딘가 묘하다. 동호는 선재에 시선을 고정하고, 선재는 그런 동호의 시선을 외면하고, 난주는 선재를 바라보는 동호의 뒷모습을 쓸쓸하게 지켜보는 식이다. 과거에 선재와 동호가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이 이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기는 하지만, 난주가 동호를 향해 특별한 감정을 품었다는 점은 순전히 그의 눈빛으로만 추측해야 하는 부분이다.
▲ 연극 [13월의 길목](연출 구태환)의 공연장면 중 사제지간인 수현(왼쪽, 박정길 분)과 인화(박현미 분)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사진=극단 수

▲ 연극 [13월의 길목](연출 구태환)의 공연장면 중 사제지간인 수현(왼쪽, 박정길 분)과 인화(박현미 분)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사진=극단 수


    
이처럼 눈빛으로 추정할 뿐이지만 또렷하게 드러나는 삼각관계는 또 있다. 사제지간인 인화와 수현, 수현과 친구 사이인 가실이 그렇다. 수현은 선생님을 향해 어딘가 애틋한 시선을 보내고, 가실은 수현의 이런 모습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본다.
 
# 상처받은 ‘나’를 만나다
 
주인공들의 대화는 점점 정체를 잃어간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대화 주제,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초연한 인물들의 태도는 이들이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조차 혼란스럽게 만든다. 12월도, 1월도 아닌 13월의 길목이라는 카페의 이름은 이 장소의 실존을 의심하게 하고, 대화 내용에 등장하는 죽은 자의 사연은 말하는 이의 모습과 흡사해 관객을 섬뜩하게 만든다.
 
인물의 정체는 불분명하지만 이들이 쏟아내는 회한의 정서에서는 와 닿는 점이 많다. 이 극은 한 명의 주인공이 아닌 등장인물 모두의 사연을 골고루 다룬다.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의 모습 중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에게 몰입하며 작품을 관람하면 된다. 슬픈 짝사랑을 앓고 있다면 가실에게,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공허하다면 동호에게, 변화 없는 일상에 지루해하고 있다면 정희에게 공감하는 등 그 방향은 다양하다.
 
그런 점에서 수현 캐릭터는 아쉬운 점이 많다. 색이 뚜렷한 다른 인물들에 비해 존재감이 흐리다. 선생님을 향한 불안한 사랑, 전공 내용과 무관한 꿈 등 고민의 내용은 분명하지만 이는 관객에게 제시하는 수준에 그친다. 수현은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기보다는 상대역인 인화와 가실의 사연을 살리는 기능적인 역할에 더 가까웠다.
 
유령일 수도 있는 주인공의 사연에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최창근 작가의 극작 과정으로 돌아가면 분명해진다. 최 작가는 실제 그의 주변 관계에서 이야기의 모티브를 얻었다. 고(故) 김영수 사진작가, 일본 문학 전문번역가 김난주 등 실존 인물부터 모교인 대학방송국 선후배들의 우정, 대학로극장에서 열렸던 성탄전야의 파티 등이 작품의 모델이 됐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고민이 마치 나 혹은 내 주변인들의 모습과 닮은 것은 이 때문이다.
 
***
 
배우들은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떠난다. 하나 둘 카페에 모여들었던 것처럼, 역시나 하나 둘 짝을 지어 천천히 퇴장한다. 텅 빈 무대를 채우는 관객의 박수소리는 여운이 짙다. 소리의 행방이 자신과 닮은 주인공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를 위한 박수는 자신을 향한 위로와도 같으니까. 눈물을 훔치기보다는 힘껏 손바닥을 마주칠 것! 슬픈 이야기로 가득한 이 작품으로 힐링(Healing) 하는 비결이다.
 

[공연정보]
공연명: 연극 [13월의 길목]
작: 최창근
연출: 구태환
공연기간: 2013년 4월 25일 ~ 5월 12일
공연장소: 게릴라극장
출연진: 김승철, 박현미, 김정은, 이요성, 황세원, 이서림, 조하영, 박정길, 노상원, 최성식
관람료: 전석 2만원
 
(감성을전하는문화신문=뉴스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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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기자 movie@newsculture.tvlt;저작권자 ⓒ 뉴스컬처(http://www.newsculture.t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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