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 The Stage] 외로움, 가볍게 인정하면 견딜만한

최종수정2018.09.28 08:31 기사입력2014.06.1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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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웰즈로드 12번지' 박혜선 연출

▲ 연극 '웰즈로드 12번가'의 박혜선 연출은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외로움을 갖고 외국으로 도피한 사람들이에요. 유리 같은 시대에 깨지기 쉬운 존재들이죠.”라고 설명했다.    © 황정은 기자

▲ 연극 '웰즈로드 12번가'의 박혜선 연출은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외로움을 갖고 외국으로 도피한 사람들이에요. 유리 같은 시대에 깨지기 쉬운 존재들이죠.”라고 설명했다.    © 황정은 기자


 
(뉴스컬처=황정은 기자)
관계의 시작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시작은 외로움일지 모른다. 사실 많은 이들은 '그 사람'이 필요하다기보다 '어떤 사람'이 필요해서 사랑을 시작한다. 결국 외로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허세라는 얇은 가면에 외로움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장소는 영국, 국적은 한국. 영국 웰즈로드 12번지에 위치한 한식당 '아리랑'에 출입하는 열 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머나먼 타지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연극 '웰즈로드 12번지'가 무대에 올랐다. '억울한 여자'의 작가 쓰시다 히데오와 한국의 연출가 박혜선 씨가 두 번째로 조우한 작품이다. 인간의 쓸쓸한 내면을 우화적으로 풀어내는 쓰시다 히데오와 사람 사이의 외로운 관계를 커다랗게 확대하는 박혜선 연출이 자신들만의 강점을 갖고 다시 한 번 연극무대를 만들었다.

박혜선 연출을 만났다. 웰즈로드 12번지에 위치한 '아리랑'의 사람들을 경험한 후 그녀를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녀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쓰시다 히데오, 그만의 웃음이 좋다

연극 ‘억울한 여자’는 세 번의 결혼을 실패하고 네 번째 결혼을 앞둔 여자 유코를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다수로부터 '이상한 여자' 라는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점 외로움에 갇히게 된다.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여겼던 네 번째 예비 신랑 마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속으로 되내인다. "아… 정말 억울해"

마지막 그녀의 이 대사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울렸다. 사실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을 경험하는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작품은 억울한 사람들의 억울한 마음을 제대로 노크했고, 그 결과는 제45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혜선 연출은 ‘억울한 여자’의 대본을 처음 접한 후 '이 작가 누구지?' 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일상에 존재하는 미세한 외로움을, 마치 핀셋으로 작은 모래알을 집듯 정확하게 잡아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쓸쓸함과 외로움을 이야기하면 으레 작품이 심각해지기 마련인데 쓰시다 히데오는 그렇지 않았다. 외로움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실소가 있었고, 쓸쓸함의 간극을 열고 나오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작가와의 호흡은 결국 희곡과의 호흡인 것 같아요. 사실 쓰시다 히데오를 오빠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지만 이런 친분이 함께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아니에요. 실제로 만난 횟수를 세어보면 열 번도 채 안 될 거예요. 아무래도 바다 건너 사람이니까 자주 만나기는 힘들죠. 순전히 작품으로 소통하고 있어요. 그의 작품에서 풍겨나오는 실소가 마음에 들죠."


▲ 2010년 공연된 연극 '억울한 여자'의 한 장면.     © 뉴스컬처DB

▲ 2010년 공연된 연극 '억울한 여자'의 한 장면.     © 뉴스컬처DB


 
그녀가 '억울한 여자'를 선택한 건 작품이 주는 소소한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소재는 일상적이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비판적인 방식이 눈길을 끌었다. 불편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에 매력을 느껴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작품이 올라간 당시에도 작가가 남자라는 이야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짜?' 라며 놀라는 눈치였다.  그만큼 '억울한 여자'는 여자냄새(?) 듬뿍 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굉장히 섬세한 작가에요. 지금도 같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여자랑 있는 건지 남자랑 있는 건지 싶을 만큼 이야기가 잘 통해요. (웃음) 아줌마 같은 아저씨죠. 섬세한 필력을 가진 작가인 만큼 그의 작품을 무대에 한 번 더 올려보고 싶었어요. 중간중간 그의 작품이 올라가는 일본의 상황을 알려달라고 했죠. 그러던 중 올 초 영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가 올라갔다는 거예요. '웰즈로드 12번지' 였죠. 희곡을 봤더니 '억울한 여자'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느낌이 들었어요. 마음에 들었죠."

쓰시다 히데오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른다. 박혜선 연출 역시 일본말을 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들 두 작가와 연출이 어떻게 막역한 친구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영어다. 다소 김새는 비밀일 수 있지만 영어는 두 연극인이 다른 방식의 소통을 가능케 한 샛길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쓰시다 히데오는 최근 일본에서 연극인들을 지원하는 기금을 통해 영국으로 1년 간 유학을 갔었고 저도 학부를 캐나다에서 졸업했어요. 아시아권 사람들이 서양언어인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계속 생각해보면 좀 아이러니한 거예요. 먼 나라까지 가서 언어를 터득하고 온 거잖아요. 그래서인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폭 역시 한층 넓어졌죠. 동병상련의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외국에서 바라본 모국에 대한 시선은 굉장히 아이러니하거든요. 한국인이지만 타국의 땅을 밟고 있고, 또 그 곳 사람은 아니고. 한국에서는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타국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로 크고 작은 차별을 당해요. 외로워요. 좀 억울하다고나 할까. (웃음)"

그녀가 한때 억울한 여자였기 때문인지 연극 '억울한 여자'를 연출할 때는 남다른 애착을 느꼈다. 유코라는 여인의 스토리가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굉장히 범인간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한국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공감을 가져올 수 있겠다 싶어서다. 예상은 적중했다.

"하지만 당시 작품에 일본이름을 그대로 차용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일본스럽다'고 평가해 준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쓰시다 히데오의 작품을 다시 올린다면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번안을 해도 좋겠다 싶었죠. 그러던 중 '웰즈로드 12번지'를 만났고 번안 하기에 딱이라고 생각했어요. 작가도 흔쾌히 수락해 줬고요."

영국에서 불러보는 아리랑

누구나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다. 한국에서는 모국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한탄을 해도 타지에 나가면 자신도 모르게 내 나라를 옹호하게 된다. 연극 ‘웰즈로드 12번지’에 등장하는 인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애국심은 주방장 사달수에게서 강하게 드러난다. 전주에서 한식 요리를 5년간 공부한 그는 영국에 위치한 아리랑이 한식당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작 가게 주인 마리는 아리랑에서 퓨전음식을 만들든 터키 음식을 제공하든 별 상관 없어하는데도 말이다. 마리는 인근 가계에서도 ‘핫’ 하게 팔린다는 계란찜 티라미수를 주방장에게 권유하지만 사달수는 계란찜 티라미수 같은 근본없는 음식은 절대 만들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 마리는 ‘여긴 영국’ 이라며 사달수를 설득하고 달수는 ‘여긴 아리랑’ 이라며 그녀의 설득을 거부한다. 계란찜 티라미수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그들의 모습은 외국땅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한식당 아리랑에는 늘 오던 손님이 온다. 현지에 있지만 현지 사람들과 소통하기 힘들어하는  한국인들이다. 그들은 영국 사회 내에 또 다른 한국을 만들어 외로움을 달래려고 한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적은 친근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영국인들의 텃새를 피해 아리랑으로 몸을 옮긴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큰 비수를 꽂는 가해자가 된다. 밴드 멤버로 가수를 꿈꾸는 헨드릭스와 대한상사의 부장 김승길은 매일 붙어다니지만 서로의 약점을 까발리지 못해 안달이 났고, 한인사회 정보지 편집장 한대근과 앤틱 가구 바이어 강다정, 그리고 이지혜는 미묘한 삼각관계로 서로를 시기한다.
 
▲ 연극 '웰즈로드 12번가' 공연장면.     © 사진=코르코르디움

▲ 연극 '웰즈로드 12번가' 공연장면.     © 사진=코르코르디움


 
“우리가 영미권으로 여행이나 유학을 갈 때 많은 꿈을 꾸고 가잖아요.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유효해요.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죠. 영국에 가면 자신들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한국에서의 자신을 숨기기에 급급하고 서로에게 진짜 얼굴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죠. 그렇기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을 수 없으니까요. 작품을 만들며 우리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소통할 공간이 없어 SNS에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는 게 아닐까요? 최근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 외로움의 끝은 어디일까, 라는 생각을 해요. 마주보고 있지만 그들은 몸만 서로를 향해 있을 뿐 시선은 스마트폰에 가 있어요. 함께 하지만 접촉할 수 없는거죠. 그럴수록 외로움은 더욱 커져 가상의 공간에 그 감정들을 쏟아내요.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외로움을 갖고 외국으로 도피한 사람들이에요. 유리 같은 시대에 깨지기 쉬운 존재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혜선 연출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유머’라고 했다. 씁쓸한 현실을 다루면서도 작가는 결코 웃음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한대근 편집장이 이지혜의 영국 남편에게 남성적으로 위축되고 콤플렉스를 갖는 장면은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요. 이 장면을 보면서 서구 문화에 알게 모르게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우리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박혜선 연출은 연극이 개인과 사회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에게 지금의 현실을 일깨워주고 동시에 미래의 방향성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난해 그녀가 창단한 극단은 ‘사개탐사’ 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사회와 개인을 탐색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어쨌거나 현대인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이라해도 그가 사용하는 모든 공공재는 사회에서 생산된 것들이죠. 사회와 개인이 마주하는 지점은 더욱 많아지지만 추구하는 가치는 계속 상충되기 때문에 갈등이 심화되는 것 같아요. 이런 현상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회와 개인 안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한 일들을 연극으로 깊이 탐구하고 들여다보고 싶죠. 그것이 결국 연극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갖고 있는 의무라고 생각해요.”

웃음, 연극이 그랬으면 좋겠다


▲ 박혜선 연출은 "참신한 매력을 주는 실험적인 작품이 좋다"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풀어낸 연극에 눈길이 간다"고 전했다.     © 황정은 기자

▲ 박혜선 연출은 "참신한 매력을 주는 실험적인 작품이 좋다"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풀어낸 연극에 눈길이 간다"고 전했다.     © 황정은 기자


 
극장 안에는 두 공간이 존재한다. 무대와 객석. 무대에는 빛이 있다면 객석에는 어둠이 있다. 어둠 속에 존재하는 관객들은 빛 속에 서 있는 배우를 본다. 연극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면 관객은 극장 안에서 축소화 된 인생을 보고 있는 셈이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은 객석을 나선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가는 과정이다.  이때 비로소 관객은 인생이라는 연극의 본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박혜선 연출은 연극을 통해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잘 만들어가길 바란다고 이야기 했다.

“연극은 세상을 바라보는 간적접인 길을 제시해줘요. 극장 안에서 관객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지만 극장을 나서는 순간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하잖아요. 본인이 그 빛 위에 서야 하죠.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지 길을 모를 수 있어요. 연극은 그런 관객들에게 조금이나마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어요.”

웃음이 없는 인생이 없듯 그녀는 웃음의 요소가 곳곳에 들어선 작품이 좋다.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심각하고 마냥 진지한 작품에서는 현실을 느끼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웃음은 맛깔나는 삶을 조리하는 숨은 레시피 아닌가.

“엄마랑 막 싸우다가 등짝을 한 대 맞아도, 이내 엄마는 ‘밥먹어!’ 라며 엉뚱한 이야기를 하죠. 영원한 원수지간이 아닌거에요. 혼날 건 혼나더라도 우선 밥은 먹고 보자는 거잖아요. 이런 상황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재밌기도 하고요. 연극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때문에 저는 참신한 매력을 주는 실험적인 작품이 좋아요. 제가 관객일 때는 좀 더 비판적이고 과감한 작품들이 좋더라고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풀어낸 연극에 눈길이 가요. 최근에는 연극 ‘광주 100%’ 가 그랬죠. 그 아이러니함에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낄낄거리게 되던데요.”

그녀에게 연극은 그저 직업이다. 그녀는 말했다. 잘해야 하고, 잘하고 싶은 직업이라고. 여기에 더해 약간의 사명감도 있다. 관객과 계속해서 소통해야 하는 작업이기에 그 소통이 온전히 이뤄졌다고 느껴질 때는 짜릿할 만큼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는 2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연극 옆에서 울고 웃는 것인지 모른다. 연극과 함께하기에 외로움이 조금 견딜만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의연함과 여유로움, ‘웰즈로드 12번지’의 인물들에게 고스란히 스며져 있다.


[프로필]
이름: 박혜선
직업: 연출가 겸 現 극단 사개탐사 대표
경력: <이단자들>, <그 집 여자>, <아내들의 외출>, <에릭 사티>, <가을 소나타>, <베리베리 임포턴트 펄슨>, <억울핚 여자>, <주머니 속의 돌>, <트릿> 외 다수
수상: 제45회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 <억울한 여자>, 월간 <한국연극> 선정 ‘2008 공연 베스트 7’ <억울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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