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인터뷰②]홍사빈이 눈처럼 녹아버린 순간

최종수정2020.08.02 08:00 기사입력2020.08.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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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컬처 김진선 기자] 문과 무를 연마하면서 아빠의 사랑, 장군 도안고의 따뜻함으로 20살로 성장한 정발은 어느 날, 청천벼락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장군 도안고가 권력에 눈이 멀어, 조씨 집안을 멸족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을 잃었다. 시골 의원 정영은 마지막으로 남은 조씨고아를 부탁받게 되고,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만다. 이 참혹한 이야기를 듣게 된 정발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하 '조씨고아')은 중국 고전을 원작으로 하며 고선웅이 연출과 각색을 맡아, 2015년 초연됐다. 창단 70주년을 맞는 국립극단은, 모든 연극 작품을 대상으로 '가장 보고 싶은 연극'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당당히 1위 한 작품이 바로 '조씨고아'다. 3시간 남짓 진행되는 작품이지만, 잠깐의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탄탄한 스토리에, 공감되는 대사와 장면으로 마스크가 젖도록 눈물샘을 자극하는 배우들의 호연은 '조씨고아'가 사랑받는 이유가 됐다.

배우 홍사빈. 사진= 김태윤 기자

배우 홍사빈. 사진= 김태윤 기자


배우 홍사빈. 사진= 김태윤 기자

배우 홍사빈. 사진= 김태윤 기자



"'열정의 아이콘'이 됐어요(웃음). 배우로서 어떻게 표현을 다할 수 있을지, 사실 아직도 의문이에요. 대본 안에 있는 활자를 보고, 제가 표현하는 과정에서, 약속은 돼 있지만, 마음대로 안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어떻게 표현해야지'라고 정해 놓는 게 오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은 끝났지만, 설레는 마음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작품의 여운을 마음에 품은 따끈한 정발이었다. 인물에 대한 고민도 끝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만큼, 각별하고 특별한 인연이었고, 시간이었다. 바로 배우 홍사빈의 얘기다.


'조씨고아'에서 이형훈이 줄곧 분했던 조씨고아 역(정발)에 처음으로 홍사빈이 올랐다. 이 인물은 정말 쉽지 않다. 자신이 아빠라고 생각한, 믿었던 한 사람이 자신이 태어나기 전 있었던 길고 긴 사연을, 어떻게 단번에 믿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지낸 그가 '복수'라는 표현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홍사빈은 어떻게 인물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원한, 복수하지 못했으니..'라는 대사가 있어요. 정발이는 원한이나, 분노, 이런 감정을 못 느껴 봤을 거예요. '나의 마음 속에 분노가 있었구나'라는 대사에서 느낄 수 있었어요. 정발이는 못 느꼈을 거라고요. 의미는커녕 계속 반문해서 아버지(정영)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잖아요. 그런 감정은 몰랐고, 알 거 같은 마음도 내쳤을 거 같아요."


홍사빈은 정발이 되기 위해 체력적으로 신체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쉬지 않고 다가갔다. 검술이며, 달리기며, 무대에서 팔딱되는 그 정발은 홍사빈이 흘린 땀방울의 결정체였다.


"20살 호기로운 청년이라는 표현이, 이 친구의 생동감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신체적인 표현 때문에 검술도 연마했고 체력적으로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첫 런스루(공연 전에 오르는 예행연습) 돌았는데 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극장이나 연습실을 100바퀴씩 뛰었어요. 조현호 선배님이 주신 사랑(조언)이 '극장에서 뛰다 보면 언젠가 내 목소리를 찾을 수 있는 순간이 있을 것'이었거든요. 와닿아서 땀 뻘뻘 흘릴 때까지 뛰었더니 몸도 풀리고 좋더라고요."


등장했을 때는 깡충깡충 뛰는 순진하고 순박한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긴다. 하지만 역사를 마주하고 바뀌는 그의 눈빛과 움직임은, 더 큰 아픔이 된다.


"스무 살의 미성숙한 정발의 모습을 최대한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긍정적 건강함, 체력적인 건강함을 보이려고 했어요. 머리로는 생각해도 마음으로 실천하기 어려울 때가 많잖아요. 정발은 그렇지 않아요. 그런 점이 너무 좋아 보였고, 부러웠어요. 배우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정발, 즉 조씨고아가 정영의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언제일까. 받아들이는 순간의 감정은에 대해 보는 사람은, 감히 헤아리지도, 가늠하지도 못할 정도인데 말이다.


"결국엔 아버지가 팔을 자르고, '내 말을 못 믿어?'라고 물을 때...그리고 자결하고 할 때 비로소 많은 사람의 죽음, 정영이라는 시골 의원의 선택, 절 사랑해준 도안고의 정체, 그가 죽인 300이 넘는 사람들에 대해서 깨닫게 됐을 거예요. 배우로서, 정발이로서 눈처럼 녹아내리는 순간이에요."


이 순간은 정발이 복수의 '씨앗'에 거름을 주고, 물을 줘 복수의 '꽃'을 피우게 한다.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 받아들이기 힘든 과정이기에, 보는 이마다 다른 '순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정영의 손을 들어서 만져요. 칼을 거두기 위해서요. 그때 느껴지는 아버지 손의 온기, 눈에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입술과 눈빛, 그런 것들이 아버지의 말을 믿게 했어요. 절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요. 그때 '복수의 씨앗'이 꿈틀대기 시작했을 거예요. 가슴에 정말 와닿아요."


하지만 연습하는 과정부터, 순탄할 수 없었다. 정발의 감정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에 정리의 반복을 거듭해야 했다.


"연습할 때는 믿고 싶지 않았던 적도 있어요. 비겁했던 적도 있고요. '내가 어떻게 감당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 생각에 도안고 선생님을 못 찌를 때도 있었어요. 연습 기간 동안 다르게 느끼고, 쭉 훑어보면서 다른 방향으로 보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마음을 정리했어요."

배우 홍사빈. 사진= 김태윤 기자

배우 홍사빈. 사진= 김태윤 기자



홍사빈이라면 어떨까. 정발처럼 '복수'를 결심할까. 그 과정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쉽지 않지만 말이다.


"대본에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대사가 있어요. 아버지 정영의 말을 다 듣고 하는 말이죠. 저 홍사빈이라면, 복수하려고 했을 거예요. 배우가 아닌 자연인인 저는 나약하고 용기도 부족해요.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워준, 뼈아픈 아빠의 말을 듣고 '복수' 말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후련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마음이 관통해서, 관객들도 공감하시는 거 같아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어디일까. 많은 장면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정도로, 어느 장면 하나 놓칠 수 없지만, 홍사빈은 객석에서 본 관객의 입장, 그리고 무대에 오른 정발이의 입장에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버지(정영)가 팔을 자르고, '복수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쓰러지거든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배우로는 제가 퇴장하고 펼쳐지는 장면이라 못 보지만, '복수해야겠다'라는 일념으로 버티다가, 버티다가 결국 쓰러지는 장면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좋아하는 장면이이기도 하고요."


누구 하나 '악역'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정발의 친부모의 생명까지 잃게 했고, 300이 넘는 사람을 죽게 하고, 정영의 마음마저 무너지게 한 인물 도안고. 하지만 20년 동안 자신이 사랑으로 키운 아이가, 멸족하려던 조씨 집안의 마지막 생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을 감정 또한 가늠하기 어렵다.


"정말 가슴 아픈 장면 중에 하나가, 겨루기할 때 도안고가 정발을 상대하지 않아요. 도안고의 이야기가 있겠지만,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요. 너무 가슴이 아파요. 작품에 등장하는 모두가 기구해요. 그런 사연과 감정이 쌓여서 1부 엔딩이 확 펼쳐지잖아요. 정말 엄청난 구성이죠? 연출님 정말 대단하시단 걸 매번 느껴요."


코로나19(신종코로나 바이러스)여파로 쉽지 않은 상황 속에 올려진 작품이기에 더 안타깝고 매 순간이 뜨겁다.


"이형훈 형이 '완숙함의 경지를 향해 간다'라고 작품에 대해 어느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어요. 관객들의 호흡, 숨결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번에 정말 깨달았어요. 사람들을 일으키는 힘이더라고요. '조씨고아'의 힘 역시 '생명력'이에요. 단순함이 무대에서 표현되기 힘든데, 많은 분의 땀과 고민이 무대에 올려지거든요. 그리고 관객들을 만날 때 빛을 발한다고, 그 순간이 너무 멋지고 대단해요."


'조씨고아'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신예'로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홍사빈은 다수 작품에 스태프, 조연출로 이름을 올린 실력파다. 뮤지컬 '오케피',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등 19살 때부터 시작한 스태프 경력으로 그가 닿은 작품만 40편이 넘는다.


"학교에서 공연한 순간도 너무 좋았고, 스태프로 오른 순간도 너무 좋았어요. 쉬면 오히려 불안하달까요(웃음). 선배님들을 보면서 '여유'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정진하고 싶어요. 열심히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에서, 장면을 곱씹으며 작품에 대해 조곤조곤 말하는 홍사빈에게서 앞으로의 기대가 높아졌다. '복수의 씨앗'이 아닌 '명배우의 '씨앗'. 홍사빈이 밝힌 자신의 '장점'에서도 고스란히, 그의 매력이 드러났다.


"미성숙함이요. 작업할 때 단점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무언가를 채워나갈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거든요. 좋은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윤석 선배님의 인터뷰 내용을 봤어요. 영화 '미성년'이 연극이 원작인데, 왜 연극이 좋으냐는 물음에 '시골 어디에도 극장이 있다. 누군가는 본다는 거다. 그 힘으로 무대에 선다'고요. 그 말씀이 참 와닿았어요. 저를 겸손하게 하고 스스로를 응원하게 하는 힘이 돼요."

배우 홍사빈. 사진= 김태윤 기자

배우 홍사빈. 사진= 김태윤 기자



마지막으로 홍사빈은 감사하고 고마운 분을 떠올렸다. 어려운 시기에 오른 작품인 만큼 더 애틋하고 절절한 감정이다. 홍사빈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감사한 분들에게 가슴 속 담아둔 말을 전했다. 작품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출님, 함께 한 배우분들, 스태프, 국립극단 어셔 분들, 공연 올라가기까지 힘써준 모든 분 나무 감사해요. 진짜. 특히나, 무대 뒤 스태프들 의상, 조명 등 보이지 않은 곳에서 땀 흘린 많은 분들, 정말 감사한 마음이에요. 작품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알아가게 됐어요. 또, 어려운 시기에 극장 오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의 인사 드리고 싶어요. 작품을 보시고 귀가하는 길에, 어느 날 문득 작품 생각이 났을 때, 작품을 보고 흘려주신 눈물이, 공연 올리는 힘이 됐어요. 많은 일이 있을 텐데, 더는 우환 겪지 않으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사진=김태윤 기자



김진선 기자 caro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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